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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Together

사랑이 보약

중년의 한 남성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내 볼을 타고 내린 눈물이 그의 손등에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듯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출장길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그의 앞에 놓인 작은 스크린에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장수상회’, 생소했지만 나이 지긋한 그를 울린 영화가 궁금했다.

 

                                                             * 영화 '장수상회' 포스터

 

장수상회는 동네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고집 세고 까칠한 성격의 노인 성칠(박근형)과 노인 앞집으로 이사 온 금님(윤여정)이 벌이는 노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영화는 재개발의 호재 속에 수십 년 간 살아온 집을 지키려는 성칠과 재개발 동의를 받아내려는 슈퍼사장 장수(조진웅)의 대결이 흥미롭게 진행될 뿐, 눈물샘을 자극할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금님도 재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성칠에게 접근한,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일 뿐 이었다. 그러던 중 금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성칠의 일상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성칠은 금님의 남편이었고, 장수의 아버지였지만, 치매에 걸린 이후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을 지내고 있다. 아내도 아들도 잊고 있었지만 그는 불편한 게 없다. 아내 금님을 볼 때마다 첫사랑을 대하는 것 마냥 환하게 웃었고, 아들을 만날 때면 직장의 마음 좋은 사장으로 여기고 잘 지냈다. 가족들은 성칠이 편하게 남은 일생을 보낼 수 있도록 가족이지만 타인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보살폈다. 치매환자가 과거와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격적인 대응자세를 보인 가족들의 노력에 성칠은 큰 불평 없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영화 후반부, 장수는 성칠에게 스스로 아들이라고 밝혔지만,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한다. 그러자 장수는 새끼는 어치피 부모가슴 어딘가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돌댕이라며 성칠을 위로한다. 암에 걸린 아내를 보내면서도 성칠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죽든... 울지 맙시다. 어차피 잠깐 떨어져 있는 거니까라며 애틋한 사랑을 전한다.

한참 후 중년의 남성은 필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갑자기 눈물을 흘려서 미안해요.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남성은 젊은 시절 아내에게 윽박지르고 모든 일을 마음대로 결정해버린 그 세월이 안타깝다고 했다. 처음 아내를 만난 그날의 따뜻한 설레임을 치매처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젊은 시절 조금 더 사랑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그런 아내가 2년 전 치매가 걸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남 대하듯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게 싫어 화를 많이 냈지만, 이제는 진짜 아내와 남으로 살아보겠다고 한다. 아내와 알콩달콩 연애 하듯 주변에서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살고 싶다고 눈시울을 다시 붉혔다. 그는 그게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한다며 말을 맺었다.

남성의 아내처럼 치매환자들에게 기억의 상실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존재기반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것이기에, 말기 암 이상 공포스러운 병이다. 생각해보라. 머릿속에 든 모든 것이 한순간 백지상태로 포맷돼 버린다고.

 

많은 사람들이 치매를 앓고 있다. 특히 짝이 없거나 짝이 있어서도 서로에게 소홀한 노인이라면 발병률이 3배 이상 높아진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올해가 저물어간다. 가족과 함께 할 시간도 그만큼 줄고 있다. 후회하기 전에, 늦기 전에 가족과 배우자를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자. 필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앞의 남성의 후회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박승혁 매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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