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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Together

"나를 살린 건 낚시입니다." 낚수꾼 허성은 씨

 

 

  “나는 낚시꾼이다. 사람들은 낚수꾼이라고 부른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시작한 낚시가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 됐다. 어린 시절 물고기가 연이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낚시에 대한 로망을 키웠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삶의 쳇바퀴에 올라서면서 낚시는 은퇴 후의 여유로 남겨졌다. 은퇴를 한 뒤에 낚시가방을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일상의 피로가 씻겨나갔기 때문이다. 간간히 친구들과 낚시를 떠나면, 잡는 것도 재밌었지만 기다리는 것은 더 재밌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서 그랬나보다

 

  낚시는 그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통로다.

 

  허성은(60). 그는 30대 중반,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다 갑자기 굴러 떨어진 철판에 다리가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평생을 보조기를 낀 채 생활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어린 딸과 아내를 봐서라도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는 용기가 없었다. 맨 몸뚱이 하나로 거센 세상의 풍파와 맞서 살아온 그에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그는 열심히 살아온 세상이, 배신한 것 같아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재활치료를 해도 좀체 나아질 조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의사는, “낚시 좋아하십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셈 치고 한번 다녀보세요라며 낚시를 권유했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허성은씨]

 

  그는 어차피 걷지도 못하는데라는 생각으로, 근처 저수지를 찾아 자리를 폈다.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참을 앉아 물결만 바라봤다.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사고의 아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을 조금씩 물속에 밀어 넣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고생을 알기에, 기다렸다. 그러기를 1.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낚시채비를 하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물고기를 기다리며 했던 운동들이, 그의 다리 근육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낚시는 나에게 은인입니다. 취미로 시작한 게 아니라 살기위해 한 것이지요. 결국 살았고요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직장을 잡고 가장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주말마다 낚시를 떠난다는 것. 아내는 싫어할 법도 한데, “남편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은 것이 낚시라며 불평 없이 남편의 낚시를 응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낚시에 빠지고부터는 담배와 술을 모두 끊었다. 한 달에 2~3번 낚시를 떠나는 것 이외에는 가정 일을 꼼꼼히 챙기는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 역할을 충실히 했다.

 

 

 [허씨가 2년 전 문천지 낚시터에서 잡은 44cm의 월척 붕어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낚시를 20년 넘게 하다 보니, 낚시 전문가가 다 됐다. 2년 전 직장에서 정년퇴임하고 부터는 인터넷에서 낚시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고, 주변 지인들과 동호회도 구성해 이끈다. 그는 낚시터에 도착하면 낚시를 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부터 챙긴다. 낚시하는 법과 고기의 특성 등을 주변인들에게 설명해주고, 그들이 즐겁게 낚시하도록 돕는다. 그런 실력을 아는지라, 사람들 역시 그가 낚시터에 나타나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하고 인사한다.

 

  “낚수꾼님 오셨네요. 한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에, 그는 기분이 한껏 오른다.

 

  “잘하는 거 하나 있으니까 좋네요. 낚시가 젊어서는 삶의 희망을 주더니, 나이 들어서는 많은 친구를 만들어주네요

 

 

    [최근 안강 저수지에서 잡은 붕어]

 

  그는 요즘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낚시를 하러 떠난다. 고기를 잡는 것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낚시를 하는 그 자체가 행복하다고 했다.

 

  “그냥 물속에 찌를 담그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즐겁고요. 이런 노후 나름 괜찮지 않나요

 

  허씨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앉은 강태공의 등이 참 좋다며 자신 역시 그렇게 잔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글/사진 : 박승혁 자유기고가